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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앙리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양인정)
글쓴이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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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5-02 18:49:28



1. 공간의 생산 - 앙리 르페브르

앙트르포 출판사에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을 재출판할 것을 제안한 레미 에스(Remi Hess, 파리 8대학 교수)는 서문에서 앙리 르페브르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 세계에 널리 소개된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는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내부에서 겪었으며, 그로 하여금 철학과 사회학,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자연과학, 언어학, 논리학, 정보 이론 등 현대사회의 부상을 성찰하기 위해 20세기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자기 것으로 만들게한 세기의 모험이 낳은 결과물이다. 레미 에스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이 <공간의 생산>은 모든 장르의 학문이 르페브르의 표현 수단으로 등장한다. 사회과학책에서 대면하는 낯선 물리학적 지식은 놀랍고 신선한 충격이다. 그리고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 속에서 길을 잃을 기회가 무수히 많아 적지 않은 좌절과 분노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겠다.

 

2. 피로 물든 관덕정의 시간

관덕정은 1448(세종 30)에 안무사 신숙청이 창건하였다. 관덕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관아 건물이 늘어서 있었고 관덕정앞 광장은 군사 훈련의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제주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인 성안에서 관덕정 앞은 제주인에게 섬의 중심으로 작용하는 공간 이었다.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 성문이 열리고 19015월에 천주교 신자 300여명의 주검이 관덕정 앞에 뒹굴게 된다. 194731관덕정 발포 사건으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총상을 입었다. 관덕정 앞은 광장의 기능을 충실하게 이행하였다. 성난 민심이 집결될 공간이 기꺼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관덕정이 조선왕조의 군사적 시설물로 원래 건축할 당시의 목적은 문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야 알 수 있다. 관덕정은 본래의 목적을 그대로 유지하는 물리적인 성격이 전부가 아니다. 관덕정은 행위 주체를 포함한 기억의 시간이 흐르며 만든 축적물이 쌓이며 변화하는 공간이다.

 

3. 관덕정 분수대 - 광장의 상실

19619월 관덕정 분수대는 재일제주개발협회의 첫 기증 사업의 결과였다. 재일제주개발협회의 자본으로 제주는 관광지로 개발되는 일대전환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후 관덕정은 관광지 코스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의 분수대는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분수대가 설치된 1961년은 박정희가 5.16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바로 그 해이다. 1960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난 4.19 시민혁명의 승리가 무참히도 군사정권에 넘어가 버렸던 바로 그 해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다. 8.15 광복 조선 인민의 승리가 미군정과 이승만에 유린 당했던 시간이 반복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두려웠을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을 향해 다시 4.19혁명은 또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시민의 관덕정 광장 한 가운데 분수대가 설치되었다. 19619월 제주시민은 광장을 빼앗겼다. 그리고 제주도는 기생관광이란 오명을 뒤집어 쓴 앵벌이가 시작된다. 광우병 문제가 있음에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해 민심을 끓게 만들고 광화문 광장을 일명 명박산성이라 불리던 콘테이너로 통제한 이명박정권은 광장에 모인 국민들이 두려웠을 것이다. 고노무현대통령 서거의 추모물결을 막고자 서울광장을 30여대의 대형버스 차벽으로 통제한 오세훈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세월호 사고로 분노한 시민을 막고자 박근혜정권 역시 차벽을 수시로 사용했다. 행위에 의해 공간의 유효성이 검증되니 공간이 행위를 유도하고 권력이 공간을 장악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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